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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종교]가톨릭신도가 개신교신도들에게...(지극히 공번된 교회)

teles 2014. 12. 11. 20:52

지난 글 링크------------------------------------------

0. 가톨릭신도가 개신교신도들에게...(서론)

1. 가톨릭신도가 개신교신도들에게...(오직 하나인 교회)

2. 가톨릭신도가 개신교신도들에게...(거룩한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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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온 교회를 믿나이다. ~ "(니체아 콘스탄티노플 신경 中)라고 우리는 고백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인 교회", "거룩한 교회", "보편된 교회" 그리고 "사도로부터 이어온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참교회를 판단하는 중요한 4가지 지표입니다. 그 중 우리는 지난 글에서 "오직 하나인 교회"와 "거룩한 교회"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이는 사도신경에서도 고백하는 바이며, 이러한 교회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참교회를 알아보는 표지가 됩니다.

 

  자, 이제 참교회를 판단하는 이 네 가지 지표 중 세번째인 "지극히 공번된(보편된) 교회"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3. 지극히 공번된 교회

 

   공편성이 참교회의 표지라는 것은 사도신경의 한 구절 "거룩하고 공번된 교회를 믿으며..."에 밝혀져 있다. 이는 참교회는 지역적인 것이 아니며, 유다교와 같이 민족적 제한도 없으며, 오로지 전세계적 보편적인 교회여서 인종과 언어의 다름을 묻지 않는다는 뜻이다. 문자 그대로 시공초월의 교회다.

  이 영광스러운 참교회에 대하여는 일찍이 다윗 왕이 예언한 바 있다. "땅이란 땅 끝마다 돌이켜 야훼께 돌아오고, 만백성 온갖 족속이 당신 앞에 절하로리다"(시편 22, 27-28).

 

  주께서 사도들에게 전교의 명령을 내리실 때, 전세계를 무대로 삼고 전세계의 인류로 하여금 주님의 복음을 듣게 하셨다. 유다교와 같이 민족적인 것도, 이슬람교, 불교와 같이 지역적인 것도 아니다. 가톨릭교회는 전세계적으로 일체를 이루었다.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가르쳐라"(마태 28, 19).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 15).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 8). 주님의 이 말씀은 실현되고야 말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참교회의 한 표지로서 그 공번됨을 으레 들게 된다.

  주께서 이 예언을 하실 때에는 온 세상이 우상숭배의 전성시대를 이루었고 극소수의 신자들만이 세상 한쪽에서 숨어 살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 그 예언이 실현되었다.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각지로 떠날 때 성 바오로는 "그들의 소리가 땅에 울려 퍼졌고 그들의 말이 땅 끝까지 이르렀다"(로마 10, 19)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지 30년 후 바오로는 로마인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나는 먼저 여러분의 믿음이 온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의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1, 8)라고 하였다.

  2세기 말 성 이레네오(St. Irenaeus, 130 ~ 202)는 "전 지구상에 널리 퍼져있는 신앙과 교리와 성전(聖傳)은 전세계의 교회가 마치 한가족과 같이, 또 한영혼과 한마음과 한입을 가진 듯이 일치하게 신봉한다. 비록 각국 용어는 서로 다르나 그 교리는 전혀 동일하여, 게르만 교회든지 켈트민족 교회든지 동(東)이집트 교회든지 어느 나라 교회든지 일치되어, 마치 태양이 전세계에 동일한 빛을 비추듯이 신앙도 또한 진리를 탐구하는 자에게 동일한 빛을 준다"라고 하였다.

  3세기의 오리게네스(Origenes)도 "그리스와 그 밖의 각 국민이 자기 나라의 법률과 관습을 버리고 모세의 법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을 신봉하는 이들이 날로 늘어간다. 이로 말미암아 그들의 재산은 몰수되고 생명은 칼 아래 이슬이 되었으나, 교회는 의연히 융성하여 각계 각층에 크게 퍼지고 있다. 이는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고 오직 하느님께서 커다란 능력으로 하시는 일임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런 보편성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오직 가톨릭교회에만 실현되어 온다.

  프로테스탄트교회는 약 300여개 파 이상으로 분열되었으며 교파마다 그 내용이 서로 다르고 각파는 지방과 시대를 따라 또 그 색조를 달리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들은 사도신경의 "거룩하고 공번된 교회를 믿으며..."를 외기는 하면서 공교회(公敎會), 즉 가톨릭(Catholic ; 보편된, 공번된)이라는 명칭은 배척한다.

  다만 가톨릭교회에만 Catholic, 즉 '공교(公敎)'라는 명칭이 적합하다. 이는 역사와 현실이 증명하는 바다. 가톨릭교회만이 고대로부터 '공교회'라는 명칭을 공식으로 지녀왔고, 어떠한 핍박과 능욕의 시대에도 의연히 공교적 가치를 더욱 높이 들었었다.

  가톨릭교회만이 예부터 '공교회'의 명칭을 지녀왔음은 교회 역사상 뚜럿한 사실이다. 이에 관하여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교자들이 자기들끼리 또는 미신도들과 얘기할 때 가톨릭교회를 항상 가톨릭, 즉 '공교회'라 지칭하였다. 이는 전세계를 통하여 이 명칭으로 공인되었고 이외에 다른 명칭으로는 상호간을 구별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De Vera Relig., c. 7. n. 12)라고 하였다.

 

 가톨릭교회는 명칭으로도 그렇거니와 실제로도 세계 보편의 공교회이다. 이제 그 실증을 들려 한다.

 1869년 교황 비오9세 당시 로마 바티칸에서 개최된 대공의회에 가톨릭의 지방 사목자 1천여 주교 중 8백여 주교가 모였었다. 2백 명은 일이 있어 불참하였다. 그들은 영국, 아일랜드, 프랑스, 독일, 벨기에, 덴마크, 기타 유럽 각국에서, 또 캐나다, 미국, 멕시코, 기타 남미 각국에서, 아프리카와 호주에서, 문화의 발상지인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서안에서, 그리스도교의 발상지인 요르단 강변에서, 다마스커스와 레바논 산과 기타 아시아 각국에서 참석하였었다. 공화정 혹은 군주정권 아래의 모든 인종을 대표한 사목자들이 한곳에 모여 한 교황의 사회로 교회 내의 여러 중대 문제를 토의하였다. 이 공의회에 참석한 각국 주교들은 묵시록의 말씀대로 "주여, 당신은 죽임을 당하셨고 당신의 피로 값을 치러 모든 민족과 언어와 백성과 나라로부터 사람들을 구해 내셔서 하느님께 바치셨습니다"(묵시 5, 9)라고 하였을 것이다.

  반면, 개신교는 300년 간의 발전상을 만족히 여기는 듯 하나 이를 한번 해부해 볼 필요가 있다. 즉 프로테스탄트 각파의 총수를 300 교파로 나눠보라. 만일 가톨릭교회에 대박해만 없었고 교통의 편의만 허용되었다면, 300년간의 전교 성과가 어찌 그에 비길 것인가! 교회 창립 이후 로마제국의 대박해가 있었지만 3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벌써 제국 내의 방방곡곡에 침투되었었다. 그뿐 아니라 프로테스탄트는 3백년 동안 약 3백교파 이상이 생겼으니 해마다 한 파씩 분열된 셈이다. 여기에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분립 교파의 수에 정비례하여 새로 분열되는 파의 수도 많아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근래에는 20교파가 새로 생겨났다. 분열 분열 또 분열... 과연 이것이 참교회의 모습일까!

 

  실로 가톨릭교회는 시공을 초월하여 인종, 민족, 남녀, 노소, 부귀, 빈천의 차별없이 누구에게나 다 같은 신도의 일원으로 교회의 모든 영적 은혜를 균등하게 베풀어 준다. 그러므로 어느모로 보든지 가톨릭교회만이 '공교회'라는 칭호에 적합하다. 그러나 이 논술은 결코 가톨릭을 과장하려 함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수의 많고 적음으로 의/불의를 판단하지 않으시고 그 내적 가치에 따라 판단하신다. 우리가 진실한 신망애덕의 생활로 교회의 정신을 체득하지 못하면 오히려 가톨릭 신도의 영예를 더럽히게 될 것이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주님의 은총을 잃지 않는 자만이 참된 가톨릭 신도이다.

 

  하느님의 완덕과 선과 아름다움을 성심껏 따르는 의인 한 사람의 영혼이 사욕 편정(邪慾偏情)에 빠져 주님의 가르침을 저버리는 수만 명의 인간보다 주님의 눈에는 더 귀중한 것이다.

  부폐한 소돔의 전 주민은 멸망당했지만 성조 아브라함 한 사람은 하느님의 애호를 받았다. 엘리야는 이세벨의 식탁에서 함께 먹던 바알의 예언자 400명 보다도 하느님 앞에 훨씬 존귀한 존재였다.

  예수 승천 후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사도들과 그 제자들의 작은 무리는 암흑과 죽음의 그늘 밑에 앉아 있던 대로마제국 전체보다도 하느님께 더 귀중한 존재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진한 보고를 가진 그 교회의 일원이 된 은혜를 늘 감사히 여겨야 하며 더욱 기쁘게 생활해야 한다.

출처 : 경제
글쓴이 : 라파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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