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 링크------------------------------------------
0. 가톨릭신도가 개신교신도들에게...(서론 및 목차)
1. 가톨릭신도가 개신교신도들에게...(오직 하나인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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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직 하나의 교회를 세우셨고 그 교회는 다름아닌 가톨릭교회라는 사실을 말씀드렸고 그것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임을 말씀드렸습니다. 또한 개신교신도들이 오해하는 것과는 달리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르치신 믿을 교리와 성령께서 교회 초기에 사도들에게 계시하신 신조를 그대로 가르칠 뿐이며, 교회에서 어떤 교리를 믿을 교리로 선포한다면, 이는 이미 사도들에게 계시되어 성경이나 성전(聖傳) 중에 함축된 진리를 더 자세히 밝혀 놓기 위한 공포일 뿐, 결코 없던 교리를 새로 만들어 선포하는 것이 아님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예수께서 세우신 가톨릭교회를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해 왜 거룩한 교회라 고백하는지를 말씀드리려합니다.
2. 거룩한 교회
거룩함, 즉 선성성은 참된 교회의 한 표징이다. 이는 우리가 사도신경의 한 구절에서 "거룩하고 공번된 교회를 믿으며..."라고 고백하는 까닭이다.
가톨릭교회는 주 예수께서 신도들을 성화(聖化)시키기 위하여 세우신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성 베드로는 당시 신도들에게 "여러분은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I베드 2, 9)라고 하였다.
우리 교회를 창립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숭고하신 윤리 교훈과 그분이 세우신 성사(聖事)는 우리를 성화하고 향상시킨다. 교회에서 주님의 공의와 인자와 신성과 진실을 말함은 다만 주님의 완덕을 찬송하고 찬미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주님의 모범을 본답아 공의롭고 인자하고 거룩하고 진실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교회는 언제나 구세주의 강생과 그 행적과 돌아가신 일 등을 들어 신도들의 성화를 도모한다. 열심한 신도들에게 마구간에서 태어나 나자렛에서 가난한 생활을 하시고, 우리의 죄악을 씻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발자취보다 강력한 감화의 동력이 또 어디있겠는가. 주께서 사도들을 전세계에 파견하여 복음을 전하게 하심과 주님의 거룩한 이름으로 온 나라에 성전(聖殿)을 세움과 신부가 지구의 끝까지 파견되는 것이 모두가 신도들을 성화하기 위함이다. 성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에게 각각 다른 선물을 은총으로 주셔서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들은 예언하는 사람으로, 어떤 사람들은 전도자로, 어떤 사람들은 목자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을 준비시켜서 봉사활동을 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자라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마침내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 성숙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에페 4, 11 - 13)라고 하였다.
가톨릭교회가 신도들에게 선포하는 도덕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고지선한 완전한 도덕이다. 교회의 여러 성인들의 행적은 어지러운 이 세상에서 떠다니는 우리를 영원의 피안으로 인도하는 별과 같은 구실을 하며, 하느님의 은총을 배반하고 타락한 사람들의 전기는 마치 위험을 예보하는 횃불처럼 우리를 깨우쳐 저 무서운 바다 밑의 암초를 피하게 한다.
가톨릭교회는 신도들이 성화해야 할 이유만을 역설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성화의 방법을 강구해 준다. 즉 기도와 성사가 그것이다. 교회는 우리가 시시각각 기도와 묵상으로 하느님과 대화하기를 권장한다. 하느님의 은총을 얻는 최대의 원천은 교회의 칠성사이다. 즉, 세례, 견진, 성체, 고해, 신품, 혼인, 병자 성사이다.
우리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로써 다시 태어나는 은총을 받아 이로부터 그리스도 신비체의 한 세포가 된다.
성 바오로의 말씀과 같이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습니다"(갈라 3, 27). 마치 성령이 그리스도와 서로 떠나지 못하심과 같이, 우리 육체는 성령의 궁전이 되었고 우리 영혼은 주님의 성소(聖所)가 된 것이다.
견진성사로써 하느님의 새 은총을 얻어 일생 동안 모든 유혹을 물리칠 만한 사람이 된다.
성체성사에 의하여 우리는 하늘에서 온 '살아 있는 빵'으로 양육된다.
고해성사로는 세례 후의 모든 죄를 씻어 버린다.
신품성사로는 성사의 권한을 받으며 성직을 충실히 해 나갈 수 있게 한다.
혼인성사로는 아내와 남편에게 은총을 베풀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자녀를 낳고 기르게 한다.
병자성사로써 임종 때 하느님의 은총을 얻고 세상을 영원히 이별하기 전에 용감하고 정결하게 한다.
한마디로 가톨릭교회는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태어날 때부터 무덤에 이를 때까지 늘 지켜주고 감싸주며 생명과 불멸의 영약을 준다.
이렇게 교회는 신자들의 성화의 필요를 역설하는 동시에 그 방법도 제공하므로 교회 안에는 신성한 결실로 무수한 성인들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가톨릭교회의 달력은 12사도의 이름 뿐 아니라 "돌에 맞아 죽고 톱질을 당한"(히브 11, 37) 모든 순교자의 이름과, 수많은 거룩한 증거자와 은수자와 깨끗한 동정 성녀의 이름으로 장식되어 모든 날을 다 성인 기념일로 정하였다. 그들의 전기, 예를 들면 성 베네딕토, 성 프란치스코, 성 돈 보스꼬, 성녀 데레사, 성녀 루치아 등의 행적을 읽고 감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성인 성녀를 무시하는 프로테스탄트(개신교)는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가톨릭과 마찬가지로 성인 성녀를 공경하는 러시아/그리스 정교나 영국 성공회는 가톨릭에서 분리되기 전의 성인 성녀는 공경하지만, 분리 후에는 자기 교회에서는 성인다운 사람은 하나도 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한다.
가톨릭교회는 예전 뿐 아니라 현대에도 성인 성녀가 계속 나오고 있다. 19세기만 하여도 31명이 복자로, 78명이 성인으로 선언되었으며, 그들의 성덕은 그 지방의 비가톨릭신자조차 칭송하여 마지않는 바다. 우리가 20세기의 사도를 보고 싶다면 유럽에서 공산당 폭동이 일어났을 때 스페인, 멕시코와 러시아와 그 위성 국가에 있는 주교 중에서 찾아볼 수있을 것이다. 바로 오늘날에도 공산국가에서 가톨릭교회는 공공연한 박해를 받고 있다. 그러므로 옥중에서, 혹은 유배 중에, 베드로와 바오로에 비길 만한 숭고한 용기를 보이는 여러 신부, 수사, 수녀들과 신도들이 함께 순교를 감행하고 있다. 잔혹한 형벌에도 굽히지 않고 신앙을 위하여 의연히 순교하는 사실이 세기마다 얼마든지 있다. (1989년 [로메로]란 이름으로 영화화되어 잘 알려진, 엘셀바도르 군정의 폭압에 저항하다 순교하신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가 곧 시성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세기의 한국 순교사를 보라! 배교하겠다는 한마디로 얼마든지 살아남을 수 있는데도 그대로 온갖 형벌을 받아 분골쇄신하여 생명을 버린 순교자가 약 1만여명이나 되지 않았던가. 한국전쟁 때에는 홀몸으로 얼마든지 도피할 수 있음에도 끝까지 수난당하는 양떼와 생사를 같이 하여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현장에서 참살당했거나 납북되어 온갖 모진 형을 받다가 죽은 교황 사절 방주교를 비롯한 여러 주교, 신부, 수도자들의 영웅적 순교사실은 우리가 몸소 목격한 것이 아닌가!
(얼마전 아프리카 수단에서 모든 것을 바쳐 사랑을 실천한 이태석 신부의 이야기는 심금을 울린다. 가톨릭교회에는 수많은 성직자들이 전세계에 퍼져 이태석 신부와 같이 헌신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이제 오해를 피하기 위해 한마디 덧붙이자면, 교회가 거룩하다하여 그 신도 모두가 '성인'이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물론 신도들 중에도 가톨릭 신도라는 이름만 가졌지 도덕적으로 부패한 사람도 많이 있다. 이런 탕자를 자모이신 교회가 영영 내쫒지 않는 이유는 쉽게 알 수 있다. 교회의 정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 합치된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I디모 1, 15).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 13).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하느님의 벗이 되게 하기 위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우리를 맺으셨고 그들은 감복하여 주님을 따랐다.
그러므로 교회는 주님의 모범을 따라 아무리 타락한 대죄인이라도 교회에서 영영 내쫒지는 않는다. 이는 교회가 그 죄악을 허락하여서가 아니라 그 죄인의 회개를 기다리는 애덕행위에서이다. 교회는 결코 죄인에게 실망하지 않는다.
교회 안에서 가끔 발견되는 악한 존재가 결코 교회의 신성성을 손상하지는 못한다. 소수의 불량 신자가 섞여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교회를 '거룩한 신도들의 모임'이라고 불렀다. 시대의 변천과 환경의 악화로, 부패와 해이의 분위기에 싸인 16세기의 일부 교회가 자못 일대 혁신을 필요로 하게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 점만을 들어 어떤 이는 "교회를 세운 주장자는 거룩하고 그 목적은 거룩하다 할지라도 역사가 증명하는 바와 같이 중간에 교회가 교주(예수)의 창립 본의를 떠나서 부패 타락하였으니 그 일은 어쩐단 말인가"(韓聖果 著 [성서를 통하여 본 천주교의 오류] 제2장)라고 공격한다.) 그러나 그때에도 타락한 교역자나 수도자보다 정결한 교역자나 수도자가 절대적으로 많았음은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다. 현재 미국만 해도 가톨릭 신부가 5만명은 족히 넘는다. 만일 그 천분의 일인 50명의 신부가 타락했다면 그 누명은 5만명의 신부가 함께 뒤집어 쓸 수 밖에 없듯이, 16세기의 교회도 소수의 타락한 신부들의 죄과에 딱하게도 연좌되었던 것이다. 교황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가톨릭교회를 원수처럼 여기는 사람들은 오직 문제의 대여섯 교황을 들어 비도덕가라고 비난한다. 가령 이를 사실이라 치더라도 266명의 교황 대 오륙 명의 교황은, 12사도 대 유다 한 사람보다 작은 비율이다. 유다 한 사람의 존재로 사도단의 신성성을 부정할 수 없다면, 일시적이고 국소적인 현상으로 가톨릭교회의 신성성을 부인할 수는 더욱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잎에서 말했듯이 가톨릭교회의 모든 신성한 결실이라든가(이런 결실이 과연 개신교회에 있는지 형제들은 살펴보시길), 그리스도교 전파에 끼친 교황의 공적, 인류 문명 선도에 역점이 되는 교황의 공헌 등은 모두 덮어버리고, 다만 일시적이고 국소적인 약점만을 번번이 들춰내는 것은 너무나 공정성을 잃은 논법이라 아니할 수 없고 또 바른 마음에서 나오는 말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부도덕한 교황 몇 사람을 들어 266명의 교황이 모두 그러하다는 인상을 대중에게 심어주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도 논리적 정신의 정상 상태와 바른 의지를 상실한 사람들이다. 266명의 교황 중 79명은 성인으로 선언되었다. 세속 권세의 압력 없이 교회가 자유 자재로 교황을 선출하려 할 때는 70여명의 추기경 중 언제나 학식과 덕망이 가장 높은 인물이 당선되어 왔고 또 이렇게 되지 않을 수 없음이 교회의 현실이다. 이를 부정한다면 다른 무엇으로 표준을 삼을 수 있을까.
교회의 혁신이 필요할 때가 있다면 그 방법 문제도 또한 중대한 것이다. 그 혁신은 교회를 이탈해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죄악을 정복할 수 있는 강한 무기는 빛나는 덕행과 열렬한 기도와 특히 성사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떠나서는 이런 무기를 얻을 수 없다. 옛부터 진정한 개혁은 모두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교회는 언제든지 왕성한 생명력의 원천과 혁신의 요소와 성화의 방법을 자체내에 갖추고 있는 까닭이다.
성 가롤로 보로메오(St. Charles Borromeo)는 당시의 대혁신자로서 그 하부 성직자와 신도들의 도덕을 향상시키는 데 일생을 바쳤다. 브라가(Braga) 대주교 바르톨로메오는 사회 계급의 상하 빈부를 가리지 않고 그 죄악을 없애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성 이냐시오(St. Ignatius)와 성 알퐁소(St. Alphonsus)는 동료와 함께 유럽 전역의 도덕 혁신과 호교의 명성으로 대성공의 영광을 얻었다. 가톨릭교회 내의 이 저명한 개혁자들은 말로만이 아니라 놀라운 성덕으로 각기 큰 업적을 이루었다.
그러나 루터(Luther)나 칼빈(Calvin), 츠빙글리(Zwingli), 녹스(Knox), 헨리8세 등의 사생활과 그들이 한 일의 결과를 지금 열거한 진정한 개혁자들의 그것에 비해 보라. 그 차이가 어떠한가. 루터파 개혁자들의 사생활은 잔악과 약탈과 음험으로 넘쳤고(특히 루터의 불미스런 언행은 대역사가 그리자르(Grizar) 씨의 루터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또 1541년 루터가 지은 [Hans Wurt]가 그 대표적 부정한 언행을 증명한다), 그들의 반역은 결국 피비린내나는 내란과 종교전쟁, 수백을 너는 교파의 분열을 일으켰을 뿐이다. 당시의 부패를 일소하기 위한 혁신 대업을 성취하려면 으레 교회의 책임자와 협력하여 정의로써 일에 착수함이 당연한 순서이었을 것이다. 일찍이 하느님 제단 아래 엎드려 순명/가난/정결 서원을 공공연히 발표한 그들이 오만과 음욕에 빠져 그 맹서를 깨뜨리고 교회를 이탈하였다. 루터, 츠빙글리, 녹스 등은 일찍이 가톨릭교회의 신부로서, 자신들이 미사성제를 봉헌하던 제단을 무엄하게도 파괴해 버리는 패악에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실로 하느님께 대한 그럴 수 없는 모욕이다. 만일 그들이 반기를 들지 않고 자신의 욕심을 억제하고 가톨릭의 개혁자와 일치 협력하여 진정한 개혁에 몸바쳤더라면 그들은 십자가의 사도로서 하느님과 만민앞에 알마나 고귀한 불멸의 영예를 읻었겠는가. 그날엔 그들은 교황과 주교와 성직자와 평신도로부터 존경의 환호를 받았을 것이며, 성 가롤로 보로메오와 성 이냐시오와 아울러 성전의 제단 위에서 존경을 받을 것이며, 분열없는 주님의 몸인 한 교회를 섬기게 되었을 것이다.
[울지마 톤즈 -- 이태석 신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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